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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한쪽이 이가 아파 음식을 잘 못 먹어 다른 한쪽이 정성껏 죽을 쒀 왔는데, 하필 그 죽에 들어간 전복이 질겨 아픈 이가 그 죽을 먹지 못하자, 죽을 쒀 온 이는 실망해서 토라지고 화를내면, 하는 수 없이 아픈 이는 아픈 이를 부여잡고 그 질긴 전복을 먹느라 안 그래도 아픈 이빨이 아작이 날 때...... 그래서 죽을 먹는 이는 내가 지금 정말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벌을 받고 있는 건지, 이 죽(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리석게도) 헷갈리는 그런 때.
백예린 - 돌아가자 나는 당신 생각하다 하루가 다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또 이렇게 밤 지새우네 망설이며 주저하던 순간들 네게 다 주지 못한 마음 이렇게 또 남아서 난 이제 어쩌면 좋을까 차라리 다 사라져 버리면 좋겠네 이제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돌아가자 익숙한 저 언덕 너머 혹시 내가 문득 그리워진대도 돌아가자 길었던 꿈의 반대편으로 어찌하든 흘러가는 시간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반하고 또 그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게서 다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이제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돌아가자 익숙한 저 언덕 너머 혹시 내가 문득 그리워진대도 돌아가자 이젠 낯설기만 한 일상 속으로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돌아가자 익숙한 저 언덕 너머 혹시 내가 문득 그리워진대도 돌아가자 길었던 꿈의 반대편으로
양안다 - 축하해 너의 생일을 너는 꿈을 꿨다 더 이상 내가 너를 바라보지 않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오래 잡지 못하거나 혹은 남들과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거나 너를 좋아했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남자들이 너를 왜 힘들게 했고 네가 죽고 싶을 때마다 그 마음을 숨긴 채 노래 가사를 적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꿈에 대해 말한 그때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오래 잡을 수도 걷는 동안 서로의 보폭에 주의를 기울이고 내가 죽고 싶을 때마다 그 마음을 숨긴 채 너에게 시를 읽어 주거나 나를 좋아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여자가 나를 얼마만큼 이해했고 나는 그 여자를 생각하며 어떤 시를 썼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꿀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그러지 않을 꿈을 꿨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
이영광 - 높새바람 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 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 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박서영 - 상실 잃어버린 것들을 수확하는 밤이 온다 뿌리째 뽑혀 올라온 슬픔에는 아흔아홉의 꼬리가 달려 있다 아흔 아홉의 꼬리가, ​ ​바람이 끌고 간 것들이 돌아오는 밤 그들은 어디든 가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잃고 또 끝없이 얻는다 저 단단한 보도블록 안에 숨겨놓은 추억이 있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 아흔 아홉의 꼬리를 흔들며 기억이 지워진다 치매처럼 잃어버린 기억들이 끌려 올라온다 순간을 얻고 백 년을 잃는다 천 년을 얻고 또 백 년을 잃은 채 돌아오는 시간으로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모순 ​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준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이규리 - 특별한 일 ​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최영미 - 어느새 ​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 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밟힌 신록이 얼마나 시리도록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 / 어느새